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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오릉 ('05.10.9)

한반도 여기저기

by kwonpolice 2021. 3. 2.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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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오릉

목차

  1. 익릉
  2. 경릉
  3. 홍릉
  4. 창릉
  5. 명릉

서울 서쪽과 경계를 이루는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창릉·익릉·명릉·경릉·홍릉 등 5기의 왕릉이 있어 서오릉이라 한다. 총면적 55만 3,616평으로 구리시의 동구릉 다음으로 큰 조선왕조의 왕실 족분군이다. 서울 구산동사거리에서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인데다,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인근 주민들이 아침 저녁 산책코스로도 즐겨 찾는 곳이다.

1457년(세조 3) 세조는 원자였던 장(, 덕종으로 추존)이 죽자 길지를 물색케 했다. 이때 지금의 서오릉터가 순산순수()의 길지로 간택되어 세조가 직접 답사한 뒤 경릉()터로 정하매 조선왕족의 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뒤 덕종의 동생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창릉(),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김씨의 익릉(),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의 쌍릉과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능을 합쳐 부르는 명릉(), 영조의 비 정성왕후 서씨의 홍릉()이 들어서면서 서오릉이라 불렀다.

서오릉엔 그밖에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와 공빈 윤씨()가 묻힌 순창원()이 있고, 영조의 후궁이며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묘를 신촌에서 옮겨온 수경원(), 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의 대빈묘()가 있다. 서오릉은 1970년 사적 제198호로 지정했다.

교통, 숙식 등 여행에 필요한 기초 정보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있다. 행주산성 입구 한일가든 앞 삼거리로 다시 나와 행주대교·일산으로 가는 왼쪽길을 따라 0.6㎞ 가면 행주대교 앞 사거리에 닿는다. 행주대교 앞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난 39번 국도를 따라 0.8㎞ 가면 다시 능곡사거리가 나온다. 능곡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1.9㎞ 가면 길 오른쪽에 행신동 소만마을 APT가 있는 가라뫼사거리가 나온다. 가라뫼사거리에서 오른쪽 398번 지방도로를 따라 서울 수색동 방면으로 2.7㎞ 가면 화전역 앞 사거리에 이른다. 화전역 앞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난 60번 시도로를 따라 3.3㎞ 가면 용두사거리가 나온다.

용두사거리에서 오른쪽 시도로를 따라 서울 구산동 방면으로 1.5㎞ 가면 길 왼쪽에 서오릉이 나온다. 서오릉 매표소 주변에는 대형버스가 한두 대 정도 주차할 수 있는 작은 주차장이 있다. 주차료는 받지 않는다. 주차장 주변에는 갈비 등을 파는 음식점은 많이 있으나 잠잘 곳은 따로 없다. 서오릉 앞으로는 서울에서 일산으로 가는 159번 시내버스 72-2번, 158-4번 좌석버스가 약 10분 간격으로 다니는데 모두 광화문 앞에서나 지하철 3호선 녹번역 앞에서 타면 된다.

[지도] 서오릉 가는 길

익릉

서오릉에선 특히 한 많은 궁중 여인네들의 처연한 삶을 많이 만난다. 능역에 들어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매봉 정상에 있는 송신소탑을 바라보며 올라가면 영조의 넷째 부인이며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수경원을 만난다.

수경원을 지나 올라가면 서오릉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자리잡은 익릉이 나온다. 제19대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1661~1680)의 능이다. 홍살문에서 시작되는 참도가 큰 계단식으로 돼 있어 이채롭다. 그 정면에 최근에 새로 단장한 듯 산뜻하고 큼직한 정자각이 있다. 좌우로 익실()이 달린 정면 5칸 측면 5칸집이다. 정자각 오른쪽에 비각이 있다.

익릉 전경제19대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의 능이다. 서오릉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능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이 좋다.

인경왕후는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딸이다. 열 살 때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숙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된다. 1680년(숙종 6) 천연두를 앓아 발병 8일 만에 경덕궁 회상전에서 세상을 뜨고 만다. 이때 왕비의 나이 겨우 스무 살, 어느새 세 딸을 두었으나 두 공주는 벌써 어미의 죽음을 앞질렀으니 인경왕후의 운명도 참으로 기구했다.

익릉은 숙종의 능제 간소화정책이 내려지기 전에 조성된 것이라 종전의 『국조오례의』() 제도에 따르면서 임진왜란 이후의 변형된 양식을 취하고 있다. 그 영향으로 나타난 게 장대한 석물과 팔각장명등이다. 양 옆에 문·무인석이 서 있는데 문인석은 자그마치 키가 245㎝나 되는 거대한 상이다. 장대한 장명등과 망주석1)의 대석에 아름다운 꽃문양을 새겨넣었으나, 이전 시기에 망주석의 귀에 뚫었던 구멍이 없어졌으며, 내려가던 망주석의 세호2)가 위로 올라가는 모습도 새로운 형식이다.

넓적한 아랫단과 네 귀가 둥근 돌로 상석의 굄돌을 삼았고, 둥근 굄돌에는 용머리를 정면에서 양각해 사방에 새겼으며, 아담한 봉분에 병풍석 없는 난간석을 두르고 12간지를 글자로 돌아가며 새겼다. 호석 뒤로 꽃담처럼 솜씨를 낸 곡장을 둘렀고, 능역의 잔디밭 밖으로는 잘 자란 소나무들이 소담하게 서 있다.

남향으로 앉은 봉분에서 정면 맞은편 너머가 수색이다. 앞이 시원스레 트였으며 왼편으로 큰 봉우리가 막아주고 있어 묘는 편안하면서도 쭉 뻗어나가는 힘이 느껴진다.

경릉

익릉에서 내려와 순창원을 지나면 추존왕 덕종()과 소혜왕후가 잠든 경릉이 있다. 홍살문에서 참도로 들어서며 올려다보면 세조 때부터 시행된 동원이강식의 쌍릉이 보인다. 정면에 정자각이 있고 오른쪽에 비각이 있다.

경릉에 올라서보면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앞에서 바라보아 왕은 왼쪽, 왕비가 오른쪽에 눕는 게 보통인데 경릉은 반대로 덕종이 오른쪽에 잠들어 있는 것이다. 또 왕비와 왕의 능을 착각할 정도로 덕종릉의 석물은 간소하고 왜소하다. 왕비의 능은 난간석과 망주석 등 능제의 석물들이 제대로 갖춰져 있으나 덕종릉은 난간석도 망주석도 없이 세월의 더께가 찬연한 장명등과 문인석만 서 있다. 장명등에 그 흔한 조각도 없이 공포를 둔 처마 밑 창방에만 조촐한 무늬가 있고 곡장 안의 호석도 넷뿐이다. 그래도 난간석 없이 대지에 푸근하게 안착한 커다란 봉분이 아늑해보인다.

경릉추존왕 덕종의 능이다. 대군묘의 장례절차로 장례를 치러 능의 석물이 매우 간소하다.

덕종릉에 석물이 생략된 데는 까닭이 있다. 덕종은 세조가 즉위한 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게다가 세조는 즉위와 함께 능제와 장례의 간소화를 주장했고, 이에 세조의 능제 간소화정책에 처음으로 적용된 게 덕종릉이다. 더구나 덕종은 당시 추존(1478년, 성종 9)되기 전이어서 대군묘제도를 적용했으니 왕릉에 초라할 수밖에. 덕종으로 추존된 뒤 한명회가 왕릉제로 바꿀 것을 주청했으나 목조·익조·환조 등의 능처럼 전례에 따른 것이라며 대왕대비 소혜왕후가 손대지 말라고 명했다. 그러나 소혜왕후릉은 남편이 덕종으로 추존된 뒤 왕비로 책봉되었다가 세상을 떠나 왕릉의 예를 따랐다. 소혜왕후릉의 석물은 격식을 갖췄으나 무인석의 투박한 갑옷조끼하며 거대한 석물들이 오히려 거북살스럽다.

소혜왕후릉추존왕 덕종과는 달리 생전에 왕비로 책봉되었기 때문에 왕릉의 예를 따랐다. 소박한 덕종의 능과는 대조를 이룬다.

덕종은 1438년(세종 20)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장(), 자는 원명(). 용모가 준수하고 단아한데다 예절바르고 글읽기를 좋아했다니 성군의 자질을 엿볼 수 있었을 게다. 하여 할아버지 세종과 소헌왕후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으나 병약한 게 흠이었다. 1445년(세종 27) 도원군()에 봉하고 1455년(세조 1) 세자로 책봉했으나 그로부터 2년 뒤 2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덕종의 손자 성종은 1471년(성종 2) 온문왕()으로 추존하고 1476년(성종 7) 묘호를 덕종이라 했다.

소혜왕후릉의 석호봉분 둘레에는 석호와 석양이 각 2쌍씩 모두 여덟 마리가 밖을 향해 자리잡고 있는데 모두 길상과 벽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소혜왕후릉의 석호는 다른 능의 그것보다 더 귀엽고 친근한 모습이다.

덕종비 소혜왕후는 서원부원군 한확()의 딸로 세조 1년에 세자빈에 간택되어 월산대군과 성종을 낳았다. 소혜왕후는 학식이 깊고 총명했으며 정치에도 참여했으며, 아녀자가 지켜야 할 도리를 책으로 펴낸 것이 『여훈』()이다. 덕종이 죽은 뒤 47년을 더 살다가 1504년(연산군 10) 4월 27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연산군이 생모 윤씨가 폐위, 사사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당시 관련됐던 사람들을 처단하려 할 때 그를 나무라자 연산군이 머리로 받아 그 길로 소생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홍릉

홍릉으로 가는 길 왼편에서 숙종의 넷째 부인이며 조선 제20대 왕 경종의 어머니인 희빈 장씨(, 1659~1701)의 대빈묘()를 만난다. 1970년 광주군 오포면 문형리에서 옮겨왔다. 43세를 일기로 수많은 풍문과 일화를 남긴 채 죽임을 당한 희빈 장씨의 묘는 묘터도 봉분도 곡장도 석물도 초라하고 옹색하기 이를 데 없다.

대빈묘 옆에서 홍릉과 창릉으로 넘어가는 길은 갈 수 없게 돼 있다. 나지막한 등성이 하나를 넘어야 할 만큼 멀리 떨어져 있어 관리에 불편한 점도 있겠지만 홍릉 아래쪽에 군부대가 있어 공개를 꺼리는지도 모르겠다. 현재 홍릉은 비각 옆으로 길이 나 있으나 원래는 금천교()를 건너 들어서게 돼 있었다.

묘내수를 가로질러 금천교를 놓는 까닭은 기가 헛되이 빠져나감을 방지하자는 뜻이라고 한다. 금천교를 지나면 홍살문이 보이고 그 안으로 곧게 뻗은 참도가 나 있다. 여름이면 잡풀이 무성해 참도의 박석을 덮을 지경이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까닭이다. 그 참도 끝에 3단의 석축을 엇물려 쌓고 지은 튼실한 정자각이 있다. 익공식 맞배지붕의 육중한 정자각은 3면에 방풍판이 달려 있고, 지붕에 살짝 가려진 공포의 단청이 오랜 세월 바래 고색창연하다. 정자각 오른쪽의 비각도 세월의 더께가 씌워 소박하고 정겹다.

홍릉영조의 원비 정성왕후 서씨의 능이다. 오른쪽의 빈 자리는 영조가 생전 자신의 묘자리로 정하였으나 사후 동구릉의 원릉에 묻혀 빈 공간으로 남았다.

홍릉의 주인은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1692~1757).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로 태어나 1704년 13세에 숙종의 둘째 아들 연잉군(뒤에 영조)과 혼례를 치렀다. 경종이 병약하여 후사가 없자 연잉군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세자빈에 봉해졌다. 18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으나 후사 없이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해 이곳에 묻혔다.

가파른 경사를 타고 올라 봉분에 이르면 봉분 왼쪽이 판판하게 다듬어진 채 텅 비어 있어 의아스럽다. 곡장은 분명 두 기의 봉분을 감싸안을 요량으로 둘러쳐져 있으나 봉분은 오른쪽 하나뿐이다. 생전에 영조는 바로 이 옆자리에 누울 예정으로 자신이 안치될 정혈()에 십자()를 새긴 돌을 묻어두었다고 한다. 영조가 왕비의 행장을 쓰면서 “왕궁의 43년 동안 늘 미소 띤 얼굴로 맞아주었고, 게으른 빛 없이 양전(殿)을 극진히 모셨으며, 생모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제전에 기울였던 정성을 고맙게 여긴다” 하였으니 정성왕후를 생각함이 각별했던 것 같다.

홍살문 사이로 보이는 홍릉 전경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라 참도가 풀로 덮여 있다. 홍릉은 다른 능과 달리 능역 언덕이 유난히 높다.

그러나 죽은 뒤의 일이란 무릇 뒷사람의 차지여서 손자 정조가 “장릉()의 동구()자리 또한 먼저 정해놓은 곳이었으니3) 굳이 홍릉만을 고집할 까닭이 없다”며 지금의 원릉으로 모셨다고 한다. 미리 잡아놓은 능터에 종종 뱀을 비롯한 잡물이 끼여드는 일이 있었으니 그를 염려한 탓이었을지 모른다. 따라서 당초 쌍릉터로 조성한 홍릉의 옆자리는 영영 비어 있게 됐다.

홍릉의 무인석입 가장자리가 치켜올라가 웃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남바위 같은 투구 모양 등이 17세기 말에서 18세기에 걸친 석물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봉분엔 난간석을 다듬어 세우고 기둥에 문자로 방위표시를 새겼다. 난간석주의 윗부분이 큼직한 연잎을 엎어놓은 듯해 조선 후대로 내려가는 조각솜씨임을 알게 한다. 망주석의 세호는 양쪽에서 내려가고 올라가는 모습으로 새겼으며 꼬리가 선명한 게 여간 귀엽지 않다. 사방에 귀면을 새긴 굄돌 위에 넓직한 상석을 놓았으며, 사각 장명등엔 화려한 꽃무늬를 새겼다. 양 옆에 문·무인석이 서 있는데 잘생기진 않았지만 얼굴에 함빡 웃음을 머금고 있어 인상적이다. 서쪽을 향해 앉은 홍릉은 아래서 올려다보아도, 위에서 내려다보아도 주변은 울창한 숲속이고 사람 발길조차 없어 한적하기만 하다.

홍릉 배치도

창릉

서오릉에서 가장 외진 곳에 자리잡은 창릉도 공개하지 않는다. 창릉은 조선 제8대 예종(1468~1469 재위)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가 잠든 능이다. 세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겨우 20년을 살았고 1년 2개월간 왕노릇을 하다 죽었다. 역시 20세에 죽은 예종의 형 덕종은 아버지 세조가 저지른 단종의 처참한 죽음에 대해 늘 가책을 느끼며 괴로워했다는데, 세조의 아들들은 정말 그 죄가를 받은 것일까. 네 아들 모두 오래 살지를 못했다. 세조는 즉위 2년 뒤 맏아들 덕종을 이곳에 묻어 조선의 제2능역을 마련했고, 자신의 죽음 1년 뒤에 둘째 아들 예종이 이곳에 묻혔다.

창릉예종의 능이다. 창릉은 서오릉에서 가장 외진 곳에 있다.

본래 오륙교라 새겨졌던 금천교를 지나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소나무숲 사이로 홍살문이 보인다. 정자각을 중심에 둔 동원이강식의 쌍릉은 가운데 공간을 넓은 축구장만큼이나 비워둔 채 두 봉분이 멀치감치 떨어져 있어 또 다른 맛을 준다. 왼쪽이 예종릉이고 오른쪽이 계비 안순왕후릉인데 남서향의 예종릉은 햇볕이 잘 들고 포근해 여름만 아니라면 한나절을 앉아 있어도 좋을 곳으로 전망도 시원하다.

안순왕후릉의 무인석의식용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위엄 있게 서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굼뜨고 순박한 느낌을 준다.

석물의 배치는 여느 능제와 같이 『국조오례의』에 따라 조성했다. 상석을 받치고 있는 굄돌에 귀면을 생략하고 고리를 단 점, 팔각장명등의 지붕돌 상륜부에 연잎을 엎어놓아 간소화된 형식처럼 보이지만, 장명등에 빈틈없이 새겨진 화려한 조각을 살펴보면 장식성이 강하게 드러난다. 전형적인 조각의 틀에서 변화해가는 모습이다. 양 옆에 서 있는 무인상의 갑옷조끼가 투박하지만 사실적이다. 대체로 각이 깊고 석물이 실물보다 크다는 점도 새로운 경향으로 보인다.

안순왕후릉도 비슷하다. 꽃담으로 곡장을 두르고 난간석을 세웠으나 마모가 심해서인지 방위표시는 보이지 않는다. 상석굄돌은 4면에 도깨비문양을 예쁘고 선명하게 새겼다. 망주석 아랫부분에 새긴 꽃문양도 볼 만하고 석등조각도 깊고 화려한 게 흠잡을 데 없다. 배가 불룩한 무인은 오늘도 긴 장검 빼들어 땅에 꽂고 늠름하게 능을 지키고 있다. 다만 석질이 푸석푸석해 마모가 더 심한 것 같아 보인다.

예종은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황(), 자는 명조(). 1456년(세조 2) 형 덕종이 세상을 떠나자 세자로 책봉, 1468년 9월 왕위를 물려받고 한명회·신숙주·구치관 등과 국정을 의논했다. 이는 세조가 지명한 앞의 세 중신을 왕명출납기관인 승정원에 출근시켜 왕세자와 국정을 논의케 한 원상제()란 제도에 따른 것이다.

예종은 겨우 14개월 동안 왕위에 있다가 1469년 11월 28일 경복궁 사정전에서 2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왕으로 있던 짧은 동안 직전수조법을 제정하고 삼포에서 왜()와의 사무역을 금했으며 반포는 못했지만 『경국대전』도 편찬했다.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는 청원부원군 한백륜의 딸이다. 1460년 세자빈으로 책봉된 한명회의 딸이 이듬해 병사하자 2년 뒤 세자빈으로 간택되었고 예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소생으로 효성이 지극했던 제안대군과 현숙공주를 두었고, 1498년 12월 세상을 떠나 이곳에 묻혔다.

명릉

명릉()도 역시 공개하지 않는 왕릉이다. 관리사무소로 쓰고 있는 재실 오른쪽의 오솔길로 들어갈 수는 있지만 앞쪽으론 밭게 길이 나 있어 철조망이 가로질러 쳐져 있다. 능은 워낙 길가에 있어 넘겨다보면 대충 다 보이는데 능역이 왜 이렇게 축소되었는지 의아하다.

명릉 배치도

명릉에는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가 쌍릉에 나란히 누워 있고, 제2계비 인원왕후가 이들을 내려다보면서 왼편 위쪽에 자리잡고 있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은 난간석을 연결해 두 봉분을 함께 감싸고, 난간석주에 새긴 방위표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왼쪽이 숙종릉이다. 석물의 크기가 실물크기로 줄어들어 다른 능에 비해 왜소하지만 아담하고 소박하다. 사각장명등은 작지만 꾸밈새는 손색이 없다.

숙종(1674~1720 재위)은 경희궁 회상전에서 현종과 명성왕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곱 살에 왕세자로 책봉되고 열네 살에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했다. 그후 45년간 집권하다 60세에 경희궁 융복전에서 승하했다.

숙종 때는 전 조선시대를 통틀어 당쟁이 가장 심했다. 남인·서인·노론·소론의 붕당과 정쟁이 심화되어 나라가 파탄에 이를 지경이었다. 현종 말년에 예론의 승리로 득세하던 남인이 허견의 역모사건으로 대거 실각하는 등 엎치락뒤치락이 거듭되었고, 심지어 북벌론을 둘러싼 명분논쟁까지 당파의 분쟁은 끊임이 없었다. 그럼에도 숙종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혼란하던 사회를 수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대동법을 전국에 확대 실시했으며, 병자호란 이후 양전사업을 마무리지었고, 상평통보를 주조·통용케 해서 상업활동을 지원했다. 북벌정책의 일환으로 압록강변에 2진을 설치하고 5군영제를 확립, 군제를 개편했으며, 사육신과 단종을 복위하는 등 왕권강화의 측면에서 새로운 평가·정리작업도 시도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 『속대전록』을 간행하고 『선원계보』 등을 편찬했다.

이곳에 함께 묻힌 인현왕후는 숙종의 두번째 부인이다. 여흥 민씨 민유중의 딸로 예의바르고 덕성이 높아 자상한 국모로 추앙받았으나 후사가 없었다. 아들을 낳아 득의에 찬 희빈 장씨의 간계로 폐위되었다가 다시 복위되었으나 1701년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여기에 묻혔다. 인현왕후 폐비사건과 장희빈의 일을 기록해놓은 전기체 소설 『인현왕후전』이 전한다.

인원왕후릉에서 바라본 명릉 전경동원쌍봉릉과 동원이강릉이 혼합된 매우 특이한 능이다. 사진에서 보이는 쌍릉에는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가 묻혀 있고 앞에 보이는 능에는 제2계비 인원왕후가 묻혀 있다.

숙종릉 위편에 홀로 잠든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는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딸이다. 인현왕후 민씨가 세상을 떠나자 왕비로 간택됐으나 소생 없이 살다가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원왕후는 평소 숙종과 함께 묻히기를 소원해 미리 명릉에서 400여 보 떨어진 언덕에 자리를 잡아두었다. 여기에 영조의 고민이 있었다고 한다. 인원왕후의 소원대로 하자니 정자각을 각각 세워야 하고, 그러자니 벌채를 해야 했던 것이다. 해서 영조는 지금의 위치대로 능을 쓰고 한 정자각의 제사를 받게 했다고 한다.

ⓘ 본 정보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으므로, 여행 시에는 최신 정보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오릉 (답사여행의 길잡이 9 - 경기북부와 북한강, 초판 1997., 13쇄 2012.,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김희균, 김성철, 유홍준, 문현숙, 정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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